내 바로 옆 단층 침대에선 이지원이란 아이가 자.

 

지원인 집이 대구인데 아마 꽤 잘사는 집 애인 거 같아. 걔가 쓰는 물건 대부분이 외제인 걸 보고 눈치는 챘는데, 잠깐잠깐 말하는 폼으로 봐서도 침대 구경 한 번 못 하고 산 나하고는 틀리는 애 같더라.

 

지원인 음악반 아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 학교에서 아마 바이올린을 제일 잘하는 애일 거라드라. 음악반 담임이 제일 귀여워 한대.

 

얼굴은 그다지 이쁜 편은 아니지만, 하기야 난 지금 혜린이 외엔 이뻐 보이는 애가 없으니 공정한 평가인지는 자신이 없다.

 

날카로운 윤곽이 딱딱한 성격일 거란 걸 짐작케 하는 애야.

 

다음은 연극반의 유경이라는 앤데, 얘 특기는 뭐든지 연극적으로 말하고 또 행동하지 않으면 밤잠을 설치는 그야말로 연극에 광기를 가진 애야.

 

딴딴라가 되면 머리를 깎아 버리겠다는 부모님의 협박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 학교에 온 의지의 한국인이지.

 

유경이 어머니는 딸이 의대에 가는 게 소원이셨다는데. 내가 보기에도 안경 쓴 모습하며 다부진 몸매가 연극보다는 의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니 할 말 없지 뭐.

 

공부를 굉장히 잘한다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암기엔 천재야. 그날 배운 수업 내용을 쉼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는 데는 두손 두발 다 들겠더라.

 

유경이 말로는 자긴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 넌 세상에 나가서 배우를 해야 한다고 도장 찍어서 내보내셨대. 어려서부터 듣고 보는 건 뭐든 딸딸 외웠대. 연극배우가 되는 데 있어서 대사 암기에 자신이 있으면 기본 점수는 따고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도 했어.

 

그애가 수학 공식을 연극 대사처럼 외우는 걸 너도 봤어야 하는데. 햄릿이 공식을 외울 때, 줄리엣이 공식을 외울 때, 또 <인형의 집> 의 로라가 공식을 외울 때 모습을 우린 유경일 보면서 처음 알았어.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얜 어쩔 수 없는 배우구나 싶어.

 

그 다음은 김선경이란 미술반 애야.

 

얘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저 조용히 그림만 그리는 애니까. 얜 벌써 우리들 얼굴을 수십장 그렸어.

 

늘 스케치북을 가슴에 끼고 다니는데 손을 놀리느라고 바빠서 그런지 입을 여는 일이 드물어.

 

얘가 가장 재미있게 그리는 애가 있는데 바로 박도야란 애야.

 

뭐, 도야지의 준말이냐구?

 

글쎄 계속 들어 봐. 박도야는 무용반 아인데 어떻게 무용반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씨름반이라면 모를까.

 

우리 두 배나 되는 몸매를 가졌는데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기우뚱하는 착각에 빠지곤 해. 모두 도야가 무용반에 들어온 데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는데,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서......

 

그런데 도야의 야심이 뭔지 아니. 발레에 <지젤> 이란게 있다며? 나야 있다니 있는가 보다 하는 거지.

 

한 번도 발레를 본 적이 없으니 도야가 <내 꿈은 지젤이야.> 했을 때 애들이 왜 배를 잡고 뒹구는지 의아해 하는 게 당연했지.

난 굉장히 웃기는 발레인가 보다 생각했어.

 

애들이 웃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던 도야가 아이들 얼굴만 멀뚱히 보고 있는 내가 가여웠는지 자기 책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 주더라.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무대 위에 서있는 사진이었어. 난 왜 그 사진을 보여 주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 그때 도야가 그랬어.

 

"지젤이야."

 

오, 하느님! 이게 무슨 비극이란 말입니까. 지젤을 하고 싶다는 제 앞의 도야를 보소서. 쟤가 1년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신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도야의 어디에서 지젤이 나온단 말입니까?

 

어이없음으로 굳은 내 얼굴을 보던 애들이 다시 한번 배를 잡고 뒹굴었어. 내 표정이 기가 막혔다는 거 아니니.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면서 똥마려운 듯한 일그러진 표정. 이해가 가지.

 

하지만 도야는 의연했고 당당했어.

 

애들이 웃던 말던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진을 자기 침대 머리맡에 붙이더니 이렇게 쓰는 거야. <나의 미래> 라고.

 

한참을 웃던 아이들도 너무나 의미심장한 도야의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멈췄어. 그순간 도야의 표정만은 사진 속의 지젤과 닮아있었거든.

 

모두 재미있는 애들이야.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애는 도야야. 푸짐한 몸매 하며 세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 앨 보면 마음이 다 편안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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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riu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