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린이는 아픈 아이 같지 않았어.
난 교문에서 20분이나 걸리는 꽃집에까지 가서, 엄마가 혹시 모르니까 잘 넣어 뒀다가 요긴할 때 쓰라고 챙겨 준 돈을 약간 꺼내서 장미하고 안개꽃을 사가지고 왔는데, 혜린이는 문병을 받아야 할 환자로는 보이지 않아서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꽃이 무색해지는 거였어.
혜린인 책상 앞에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자기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혜린아."
혜린인 거울을 통해서 날 봤어. 거울 속의 혜린이가 웃었어.
"왔구나."
"많이 아팠니?"
"어젯밤에만."
"꽃을 사왔는데."
그제서야 혜린인 거울을 밀쳐 두고 돌아 앉았어.
"장미구나."
"안개꽃도 있는데."
"그래, 안개꽃두."
"꽃병이 없구나. 꽃을 사고서야 생각했는데 원래 환자한테는 꽃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며."
"난 환자가 아닌 걸. 이리 줘."
혜린인 꽃을 받아들고, 자기 침대 머리맡에 스카치 테이프로 꽃을 차례로 붙였어. 갑자기 꽃그림이 침대 위에 걸려진 거야. 한 송이 한 송이 정성스럽게 붙이더니 안개꽃도 그렇게 했어.
"오늘부터 며칠 동안은 잠결에도 꽃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거야. 고마워. 태어나서 꽃을 받아 보긴 처음이야."
"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좋아."
"우리 나갈래? 라일락 냄새가 그리워. 하룻동안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파."
우린 기숙사를 나와서 라일락이 피어 있는 숲길로 갔어. 하교하는 아이들이 몇몇 우리곁을 스쳐지나갔지. 우린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나란히 앉았어.
"많이 아팠니?"
"글쎄. 쉽게 말하면 존재를 앓았다고나 할까."
얘는 쉽게 말하는 게 이런건가. 존재를 앓았다니.
"난 가끔 사는 게 피곤하다는 생각을 해. 그런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다닌 날 밤이면 누워서 이제 그만 두고 쉬자고 눈을 깊게 감아 봐. 그리곤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선 기다리는 거야. 누군가 이 깊은 잠을 깨워 주길 기다리는 거지. 그러나 다시 숨을 쉬어야 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 그럼 가슴 속으로 바람이 지나가. 휭 하는 서늘한 바람소리가. 어젯밤도 그랬어. 난 숨을 멈추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그냥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 사감 선생님이 날 들여다보고 있었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말야. 선생님이 물었어. 괜찮니? 난 그냥 자고 싶었는데. 우리 방 아이들이 수선스럽게 움직였어. 찬물 수건을 해다 머리에 얹어 주는 애, 내 몸을 마구 주무르는 애, 훌쩍거리며 날 흔드는 애, 아득해졌지. 또 돌아왔구나 싶어서. 화가 났어. 슬퍼서. 난 이제 쉬고 싶은데 모두 나보고 더 계속해야 한다고 그러는 거야."
"넌 왜 힘들어 하니? 우린 아직 어리잖아. 정말 살아욘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나이잖니.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하는 거지. 난 널 좋아해. 하지만 널 잘 모르겠어."
"너무 추워. 두렵구 무서워."
"뭐가?"
"산다는 게."
그보다 확실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모두 두렵다. 어른들은 우리가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들로 알지만 우리도 우리 나이만큼의 인생을 아는 거야. 어릴수록 두려움은 더한 게 아닐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미래로 모조건 달려가기엔 우리는 너무 머리가 커버린 것이 아닐까.
어른들은 너희들 앞에는 황금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우릴 구슬리지만 우린 바보 천치가 아니니까 황금빛 미래만을 믿을 순 없어. 황금빛 미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수없는 함정을 알고 있는 거야.
난 혜린이의 말에서 얼마쯤은 그 앨 이해할 수 있다는 동지애를 느꼈어.
결국 우린 같은 두려움으로 추위를 타는 나이란 동질감.
"나도 두려워."
혜린이가 날 봤어. 내가 있다는 게 한없이 기쁘다는 눈빛으로.
"너도 그렇니?"
"물론이야. 고향으로 쫓겨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고향집 천장이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 난 아주 작은 기회를 잡은 건데 이것마저 놓쳐 버리면 어떡하나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야. 우리 집은 감자 농사를 짓는데 그 밭에서 허우적거리는 꿈을 꾸기도 해. 흙밭에서 한없이 뒹구는 꿈. 깨어나면 침대 위라는 현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어.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건 죽기보다 싫어. 내가 허영에 들뜬 촌계집애 같니?"
혜린이가 고개를 가로저었어.
"네 두려움은 따뜻해.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 너 아스팔트 킨트란 말 아니?"
"전혜린의 수필에 나오는 말 아니니?"
"맞아. 우리 엄마가 혜린이라고 지은 것도 그 여자 이름을 따서야. 엄만 그 여자의 열렬한 팬이었대. 결국 자기 소설 한 편 남기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지. 난 아스팔트 킨트란 말이 지독하게 차갑다고 생각해. 흙냄새가 없다는 말이지. 난 흙냄새가 그리웠어. 내가 이 학교에 오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숲 때문이었어. 이 흥건한 라일락 냄새 때문에."
"넌 어딘가 우리하곤 다른 애 같아. 아주 특별한 사람 같다는 얘기야."
"너도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우리 엄만 나에게 늘 그랬어. 넌 특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구. 결코 평범해선 안 된다구. 난 그 소리가 정말 싫었어. 아무것도 내가 결정할 건 없을 거 같아서 답답했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도 엄마가 만들어 낸 말은 아니더라구. 엄마가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그 여자가 한 말이었어. 그때 난 처음으로 엄마한테 대들었어. 엄만 아무것도 엄마 자신의 건 없다구. 엄만 참지 못하고 내 뺨을 때렸어. 그리곤 막 화를 냈지.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널 만든 건 자기라고. 결국 나는 엄마의 전시물에 불과했던 거야. 엄마의 친지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주고 싶은 전시물."
"넌 엄마한테 지쳐 있었던 거니?"
"그렇진 않아."
혜린인 일어서서 라일락 나무에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한참이나 냄새를 맡았어.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한 가지 사건으로 운명을 결정짓진 않으니까. 모든 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거야. 화려한 축제와 같지. 불꽃놀이야. 한 개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해서 축제가 시작되는 건 아냐. 한꺼번에 불꽃들이 튀어 올라야지."
얜 쉽게 말하다가 곧잘 명사심리로 가버리는구나. 좋은 습관 같지는 않은데 웬만하면 고치라고 충고해 볼까. 아니 그러다 역시 넌 한 수준 밑이구나 그러면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지.
"확실하게 한 가지만이라도 확인해 봤으면 좋겠어. 하루 종일 거울을 보면서 그 속에 있는 얼굴이 진짜 나인가를 확인해 보려구 했어. 언제나 생소한 얼굴인데 이게 진짜 나인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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