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오래 얘길할 수도 있었는데, 방해꾼이 나타나 버렸어. 왜 우린 늘 방해꾼이 나타나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일까. 저번엔 지원이더니 이번엔 더 강력한 라이벌인 민설진 선배였어.

 

시간도 잘 맞춰 나타나지. 누가 연극반 아니랄까 봐 꼭 극적으로 나타나야 되나. 설진 선배는 우리를 찾아다녔는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주저없이 다가왔어.

 

"나 혜린이랑 얘길 좀 했으면 좋겠는데."

 

설진 선배는 내 이름도 모르는 눈치였어. 아니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어. 내가 힘있니. 선배한테 대들었다가 온전하게 버틸 자신이 있어야지. 비실비실 물러났지.

 

그렇지만 나도 오기가 있는데. 둘이 내 존재를 의식할 시간을 좀더 오래 가지게 하려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세월아 네월아 하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어.

 

그래서 그랬을까. 혜린이가 갑자기 돌아서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소리를 듣고 말았어.

 

"네가 뭘 알아."

 

아니 쟤가 하룻동안 거울만 보고 있었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아니면 아직도 아파서 비몽사몽간인가. 까마득한 선배한테 <네가> 라니.

 

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어. 내가 뭐 남 얘기 엿듣기나 좋아하는 애라고 생각하진 마. 혜린이가 더 실수할까 봐 망을 보려는 거였어. 누가 가까이 오면 쫓아 버리려구. 얌전하게만 보이는 혜린이가 선배한테 얘, 쟤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해.

 

"혜린아."

"날 아는 척하지 마. 날 다 알고 있다는 눈으로 보지 말라구. 지겨워. 그런 눈빛,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사기야, 사기"

"그래. 난 널 몰라. 그럼 됐니?"

"아니, 그걸로 부족해."

"그럼 내가 어떡해야 하니? 널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너한테 이유없이 미움을 받아야 하는 거니?"

"흥, 내가 널 미워한다구. 왜. 왜. 내가 왜.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쉬울 거야. 그런데 아무것도 아냐. 너도 저 미치광이들 중에 하나일 뿐이야. 넌 다르리라 생각했어. 넌...... 넌...... ."

"내가 뭘 잘못했지? 뭘 잘못해서 이러는 거야?"

"난 누군갈 위해서 죽고 싶어. 그런데 넌 그걸 말릴 인간이야. 너도 특별해지고 싶어하는 인간이야. 저 위에 서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간. 남을 위해서 하는 건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남이 널 위해서 죽는 것도 싫은 거야."

"왜 같이 사는 건 나쁜 거니.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거야?"

"절실해질 수 있길 바라는 거야. 단지 절실해지기를."

 

저 인간들이 지금 사람을 뭘로 아는 거야. 한국말로 하는 데도 해석이 안 되네. 누가 말 쉽게 하면 세금 내라고 쫓아다니나. 둘 다 이제 보니까 사이코야. 그래도 난 거길 떠나지 못하고 듣고 있었어.

 

"난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단 말야."

"알아, 혜린아. 그러니까 제발 힘들어 하지 마. 쉽게 살면 되는 거야.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난 약속하지 않았어. 내가 죽으면 제일 가까이서 날 봐 달라고. 내가 편안해 하는지."

"내가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겠니. 넌 그런 약속을 하면 정말 죽어 버릴 인간인데. 네 미움을 받으면서라도 네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죽으면 모든 건 끝이야. 살아서 이겨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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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riu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