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린이가 창을 닦던 걸레를 내려 놓고 창틀에 걸터 앉았어.

 

난 계속 손을 움직여 창을 닦으면서 혜린이를 바라보고 있었지.

 

"난 혼란스러워. 유보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걸까. 아무것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람은 누구나 뭔가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그런데도 어리기 때문에 그냥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다 어른이 되면 뭘하지. 그땐 저지르고 싶었던 일을 잊어버릴텐데."

"혜린이 넌 뭘 저지르고 싶은데."

"나 여자가 되고 싶어."

"넌 여자야. 태어나면서부터."

 

혜린이가 날 보며 쓸쓸히 웃었어.

 

"난 진짜 여자가 되고 싶어."

"넌 진짜 여자야."

"넌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난 결혼을 하고 싶어."

 

세상에. 이게 16살짜리 여자 애 입에서 나올 말일까. 16살은 학교만 다니기에도 벅찬 나인데. 또 남자 애를 보고 가슴 설레이기만도 머리가 아픈 나인데 말야.

 

"내가 까진 애 같니?"

 

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 뭐라고 대답하겠니. 그래 너 되게 까졌다 그럴 순 없잖아. 대답이 궁할 땐 침묵이 최고란 걸 난 잘 알고 있었어.

 

"난 엄마가 되고 싶어. 엄마가 되면 열심히 살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애기를 키우고, 애기에게 옛날 얘기도 해주면서. 단지 그러면 충분할 거 같아."

 

그때 반장이 와서 청소가 끝났으면 모두 돌아가라고 해서 우린 교실을 나왔어. 그리고 우리가 잘 가는 숲길로 갔지.

 

"난 이대론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혜린인 여전히 답답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어. 견딜 수 없을거 같다고. 그래서 나도 답답해졌지.

 

"재작년이었어. 난 이대로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집을 나왔어."

"가출을 했단 말이니?"

"아니, 가출은 아니었어.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도 어른스럽게 만들고 옷도 야한 걸 입었어. 그렇게 하고 종로로 나갔어. 종로 거리를 한참 걸어다니다가 그럴싸해 보이는 까페로 들어갔지. 그리곤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어. 그때 어떤 남자애가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어. 그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나도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난 침을 골깍 삼켰어. 조마조마해서.

 

"그 애가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놀자고 했어. 난 좋다구 했구. 그애 친구들과 디스코텍에 가서 늦게까지 흔들어 댔지.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데도 난 그대로 뒀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 녀석이 은근하게 굴자 난 그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어. 난 애기를 갖고 싶어. 그때 그애의 얼굴이 확 굳어졌지. 그러더니 대뜸 그랬어. 뭐 이런 게 다 있어. 너 까져도 되게 까졌구나. 누구 인생 종치게 할 일 있냐구. 이 나이에 애새끼 하나 덜렁 낳으면 우리 아버지한테 다리 몽둥이가 뿌러질 거라구. 그러면서 침을 퉤퉤 뱉더니 가버리는 거야. 보기보단 순진한 애였던 거지. 난 갑자기 허탈해져서 옆에서 놀고 있던 남자 애들에게 갔는데 그 녀석들하고 같이 온 여자애들한테 개망신을 당했어. 우스워서 그냥 나와 버렸어. 그리곤 거리에서 서성대던 깡패 같은 녀석들한테 다가갔지. 그 애들은 좀 나았어. 내 얘길 이해하는 거 같았지. 그런데 내게 다가오는 녀석이 하나가 아니었어. 무려 다섯이나 되는 거야. 난 그순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지.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난 아이가 필요하다고. 난 겁이 났어. 무서워서 소릴 치고 싶었어. 하지만 그녀석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어. 난 겁에 질렸어. 갑자기 후회가 됐지. 이건 아니었구나. 내 자신이 갑자기 소중하단 생각이 들었어. 바로 그때였어. 키가 큰 애들 몇이서 다가와 깡패 애들과 싸움을 벌였지. 제딴에는 내가 길거리에서 희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 결과는 의외로 깡패 애들의 패배였어. 녀석들은 욕을 있는 대로 뱉으며 비실비실 도망을 쳤어. 정의의 사도로 나타난 애들은 신사처럼 굴었어. 위험하니까 이런 데 나오지 말라며. 그중에 한 애가 민설진이야."

 

그랬구나. 설진 선배와 혜린인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구나. 그래서 둘 다 처음부터 어색해 하지 않고 애들의 쑥덕거림을 당하면서도 어울렸구나.

 

"그는 그날 날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어."

"설진 선배를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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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riu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