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혜린인 혜린이더라.

 

20문제 다 맞춘 앤 혜린이 하나였어. 수학 선생님이 혜린이를 본받으라고 일장연설을 하셨지.

 

하루 종일 거울만 봤다는 애가 언제 공부까지 할 시간이 있었을까. 예쁜데다 머리까지 좋은 애가 뭐가 답답해서 울고 그럴까.

 

주경이 같은 애가 울고불고한다면 내가 이해를 해. 근데 혜린이가 그러는 건 영 요상하단 말야.

 

내가 혜린이에게서 알아낸 새로운 사실은 그앤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어. 혜린이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내 느낌은 그걸 알아낼 수 있었거든.

 

어느날 청소시간에 혜린이와 나란히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유리창을 닦게 됐지. 우린 아무말도 없이 열심히 유리창만 닦고 있었어.

 

난 심심해져서 혜린이에게 무슨 말을 시켜볼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혜린이가 먼저 툭 말을 내뱉는 거였어.

 

"우린 참 어리지."

 

내가 뭐라고 대답했겠어. 15살보다는 덜 어리지 그럴 수는 없잖아. 괜히 말대꾸 했다가 열받아서 혜린이가 울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응, 어려."

"그래, 어려. 우린 너무 어려. 그래서 저절로 버릴 수도 없어. 모든 게 늘 유보 상태야."

 

그럴 수도 있지. 어리다는 건 뭔가를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배워왔으니까. 그저 열심히 공부나 하라는 교육을 받아왔잖아.

 

어른들한테 우리가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뭔지 아니? 어린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게, 이런 말들이야. 그러면서 자기들은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을 잘도 하잖아.

 

내가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한테 대들어서 혼쭐이 났던 얘기 안 해줬지.

 

중학교 3학년 세계사 시간이었어. 세계 2차 대전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너무도 당연하게 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러는 거야. 또 전쟁은 세계를 진보의 길로 걷게도 했다고 그러는데 웬지 모르게 화가 나더라.

 

싸움을 일으킨 게 어린이들이었니?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 어린애들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손을 번쩍 들었어.

 

"선생님."

 

매일 공부시간이면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쥐죽은 듯이 있던 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약간 못마땅한 얼굴을 하시더라. 왜 시간을 낭비하려고 그러느냐는 표정이었어.

 

"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전쟁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들은 인류를 진보시켰다고 하셨는데요."

"그런데?"

"전쟁이란 어차피 우두머리들의 힘자랑 아닌가요? 국민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우두머리들은 없다고 생각해요."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국민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거란 얘기예요. 그저 우두머리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편하게 살 테니까 그러는 거죠. 어른들은 참을성이 없어요. 자기들은 살만큼 살았으니까 세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지만 우리 젊은 사람들은 뭐죠. 젊은 사람들, 아니 어린 애들한테 누가 한번 전쟁을 해도 괜찮겠냐고 물어 봤나요. 자기들 마음대로 벌려놓고 나중엔 너희에게 역사의 발전을 보여 주려 그랬다 그러는 거 아닐까요? 전쟁통에 사람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왜 그게 살인이 아니죠. 그것도 역시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예요. 젊은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괴로워할까 봐 힘자랑에 이용하려구."

"정시예. 너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선생님은 무척이나 아니꼬운 표정이셨어.

 

"아뇨. 대드는 게 아니라 제 생각은 그렇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마치 모든 전쟁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난 것처럼 말씀하시니까."

"정시예. 너 저번 세계사 점수가 얼만지나 아냐?"

 

왜 그때 점수 얘기를 하셨는지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시험 점수가 나쁜 앤 자기 생각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였을까. 난 점수 얘기가 나오자 더 화가 났어.

 

"전 제 점수 얘기를 하는 게...... ."

"네 점수가 몇 점이었냐구?"

 

선생님은 내 말을 끊으며 물으셨어. 난 갑자기 기가 죽어서 있는 그대로 말했지.

 

"57점이요."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었어. 난 그때처럼 애들이 미워진 적이 없어. 난 우리들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상황에서 날 비웃을 수 있는지.

 

"그래, 57점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냐. 다음엔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안 들고 선생님한테 대들어야겠다는 생각만 들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수업과는 상관없는 얘길 해서 분위길 흐려 놔. 앉아."

 

난 선생님의 강압적인 태도에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었어. 왜 내 얘기가 수업과는 상관없는 얘긴지 끝내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가 왜 이 얘길 하느냐 하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얘길 하려고 그런 거야. 어른들은 자기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몰아 세워.

 

조금만 찔리면 점수 얘기나 하고. 난 그때 선생님이 조금만 진지하게 전쟁은 어른들의 힘자랑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시길 기대했어. 선생님이 차근차근 얘길해 주셨으면 난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오늘까지 난 전쟁은 어른들, 즉 우두머리들의 힘자랑이라고 생각해.

 

"난 네 말에 동감이야. 우린 유보 상태야."

 

 

 

! 저작권 관련하여 문제가 될 시 알려주시면 글을 모두 내리겠습니다.

 

 

 

Posted by Siriu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