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시험이란 걸 봤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수학 쪽지 시험.
우리 학교 설립 취지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시던 수학 선생님의 농간이었어.
"여러분이 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해서 세상과는 담을 쌓았다고 생각하면 큰일이예요. 요즘 세상이 어떤데 나만 좋다고 그만인 줄 알면 자기 손해란 말이죠. 다른 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좀 알아 봐요. 여러분도 진짜 예술을 하려면 대학에 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난 공부 않고 예술한다 하는 거 딱 질색이예요. 남처럼 공부하기 싫고 못하니까 핑계 대는 걸로밖에 안 보여요. 특히 문학반인 여러분은 다른 반처럼 실기만 잘해도 가능한 것과는 처음부터 달라요. 대학에 창작만 하는 과가 얼마나 있다고 그래요. 여러분은 결국 공부밖에 없다는 얘기예요. 대학에 가서 문학을 하든지 말든지 하려면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하는 거라구요. 지금은 여러분이 날 원망하겠지만 후엔 내가 고마워질 거예요. 그래서 난 문학반은 특별히 1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보려고 해요. 지금처럼 뒀다간 아예 공부엔 흥미를 잃어버릴 거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수학은 기초를 튼튼히 해 두지 않으면 말년 고생이 심한 과목이란 걸 염두에 두세요."
두꺼운 안경을 코에 걸고 깐깐하기로 이름난 여자가 그러는데 우리가 힘있어. 시험을 보라면 보고 운동장을 수십 바퀴 뛰라면 뛰는 거지. 운동장 얘긴 뭐냐구?
시험지 내고 점수를 받아 보니까 수학 선생님이 나가래. 어디로? 운동장으로. 20문제 중에 3문제를 맞췄거든.
헌데 난 내 점수를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중학교 때 내내 1등을 했다는 주경이 시험지를 그대로 보고 썼는데 15점이냐 말이야.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썼으면 10문제는 맞췄을텐데. 50점은 넘어 보자는 야무진 생각으로 흘낏 옆을 봤더니 주경이 시험지가 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 강력한 유혹을 뿌리칠 용기가 애초부터 나에겐 없었어.
에라 모르겠다. 집에 내려가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주경이 걸 그대로 베꼈어. 베껴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답하곤 틀려서 갸우뚱도 했지만 내가 잘못 알고 있나 했지. 그랬던게 15점이야.
그럼 천재 주경이는?
주경이가 내 옆에서 운동장을 돌 때 난 혼란스러워서 혼났어. 시험 안 본다고 난리를 치던 애가 누굴 놀리려고 그랬나. 그래도 그렇지. 15점이면 너무한 거잖아.
운동장 10바퀴를 돌고 숨이 차서 교실로 돌아와서 주경이에게 조용히 물었어.
"주경아, 너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니?"
"아니."
태연하게 그러는 게 더 궁금해서 미치겠는 거야.
"정말 없어?"
"왜 그러는데?"
또 태연해. 나 열받겠어 안 받겠어.
"나 네 시험지 보고 썼다."
"그런데?"
여전히 태연한 주경이를 보면서 난 바보같이 그랬지.
"나 15점 받았어."
"그런데?"
"넌?"
"내꺼 보고 썼다며."
와 정말 미치겠다. 이럴 때 어떡해야 되는 거니.
"너 중학교 땐 1등만 했다며."
"그런데."
뭐가 그런데야. 1등한 애가 15점이면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거 아냐.
"나 1등한 적 없어."
난 내 귀를 의심했어. 내가 건망증 환자도 아닌데 분명히 들은 말을 잊어버리겠어?
"너 분명히...... ."
"내가 뻥깐 거야."
"그럼?"
"나 공부 잘 못해."
15점이 잘 못하는 거냐. 아예 가망 없는 거지.
"그런데 왜 저번엔?"
"공부 잘하는 애 흉내 한번 내 보고 싶어서. 그동안 공부 잘하는 애들이 되게 부러웠거든. 넌 순진해 보여서 속아 줄 거 같드라."
그래. 내가 천치다. 천치야. 속여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날 속여 먹냐.
"넌 몇 문제나 알겠니?"
얘 봐요. 이젠 날 울궈 먹으려고 드네.
"10문제 정도."
"햐, 너 공부 잘하는구나."
그래. 잘한다. 잘해. 50점이 잘하는 거라면.
"너 다음부터 나 좀 보여 줄래?"
"너 이 학교는 어떻게 들어온 거니?"
"우리 할머니랑 이사장 할머니랑 친구야. 우리 할머니가 조르고 졸라서 겨우 들어왔어. 그래도 나 연합고사는 붙었다. 겨우 턱거리였지만."
정경유착이란 말은 들어 봤어도 할머니 유착이란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여기 학원 비리의 온상이 있었잖아. 얘를 짝으로 지내야 하는 1년이 암담하다. 왜 짝을 안 바꾸는 걸까.
"시예 너 약속했어. 다음에 시험지 꼭 보여 주는 거야."
난 주경이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고 말았어.
오, 신이여. 친구 복도 지지리 없는 정시예를 가엾이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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