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말야, 기적이 일어났어.
중학교 3학년 봄이였어.
솔직히 말하면 중학교도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다녔지.
아버지가 몇 번이나 책하고 공책을 찢었는지 몰라.
그렇다고 아버지 눈이 번쩍 뜨이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잘하는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버지 심정도 이해해 줘야 할 거야.
그런데 작년 봄 첫 국어 시간에 이 행운의 신호탄이 여지없이 터져 버렸지 뭐야.
새로 오신 국어 선생님이 첫시간이고 하니 수업을 하는 대신에 글짓기를 한 편씩 써서 제출하라고 하시대.
애들은 싱숭생숭해 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야 낫겠다 싶어서 공책에다 끄적거렸고 나도 역시 그랬어.
근데 다음 날 국어 선생님이 교무실로 날 부르시더니 그러시는 거야.
이거 정말 네가 썼니?
난 체질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가 죽어서 <네>라고 대답했지.
선생님이 씩 웃으시대.
"재밌더라. 넌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난 별 싱거운 소릴 다 묻는다 싶었어.
이런 산골 동네에서 되고 싶은 게 뭐 있겠어.
좀 잘사는 집에 시집가서 배불리 먹고 살면 내 팔자 폈다 하는 거지.
그렇지만 선생님 앞에서 어떻게 시집이나 잘 가서 배불리 먹고 살래요 그러니.
"읍내 공장에 취직해서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서 착하게 살래요."
그때 선생님이 슬프게 날 보시더라.
하기야 내가 쓴 글짓기도 우리 집 사는 얘기였거든.
슬프게 보려 들면 충분히 슬픈 거였어.
선생님이 그만 가보라고 하시대.
그래서 그냥 나왔지.
그리곤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여름방학이 얼마 안 남았던 어느 날이었어.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국어 선생님, 또 우리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에 쭈욱 들어오시는 거야.
입술을 연신 히죽거리시면서들.
교장 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그러시더니, 턱 교탁 앞에 서셨어.
그리고나서 내 이름을 부르신 거야.
난 가슴이 철렁했어.
나같이 평범하다 못해 그저 매일 결석 안하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학교를 다니는 애가 그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는 데서 이름을 불렸으니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난 비실비실 일어나서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폈어.
근데 이상하게 교장 선생님이 내 얼굴을 그저 이뻐 죽겠다는 듯이 뜯어보시는 거야.
"네가 정시예구나."
"네."
"녀석, 생긴 건 그저 그런데...... ."
내 참, 자존심 상해서.
왜 그저 그런 앨 일으켜 세우고 난리람.
애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피식피식 웃었지.
그렇게 웃던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경이로운 감격으로 물드는 사건이 교장 선생님 입에서 흘러나왔어.
"네가 장원이란다."
"네?"
요새도 과거를 보나. 난 시험 본 기억이 없는데...... .
더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대충 눈치가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때려잡았겠지.
그래, 그거야.
서울에 있는 큰 대학에서 중, 고생들을 대상으로 문예 작품 경연 대회를 열었는데 내가 쓴 그거 있지.
국어 선생님한테 드렸던 글짓기. 그게 장원으로 뽑혔던 거야.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누가 꿈이라도 꿔봤겠니.
공책에 대충대충 써낸 그 글이 내 운명을 이렇게 바꿔 놓은 거야.
그 한편의 작품이 내 인생을 약간 수정시켜 준 거지.
고등학교 진학은 그림의 떡이었던 내가 그것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오게 된 거야.
전액 장학금 학생으로 기숙사도 공짜래.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다 떨려.
내 글을 심사하셨던 분이 지금 내가 첫발을 내딛은 학교 국어 선생님이셨어.
남기철 선생님.
그분이 우리 집까지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구워 삶아 주셨던 거지.
고집 세기는 동네에서 아예 두손 두발 다들었던 아버지가 작가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공장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니 너 알아서 하라며 서울로 보내 주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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